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no future)
- Winston Churchill -
하.. 진짜 중국의 내로남불은 이제 뭐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해가 가면 갈수록 더해지면 더해졌지, 자신들이 뭘 잘못하고 있고, 세계평화나 질서에 얼마나 민폐를 끼치고 있는지는 이제 완전히 잊어먹어 버린 나라 그 자체인 거 갖네요.
이번엔 중국인들이 얼마나 멍청하고 왜 중국은 망할 수 밖에 없는지 그들의 역사를 통해 이야기해 볼게요.
[중국도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천안문 민주화 항쟁]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 혹시 "8.9.6.4."라는 숫자의 의미를 알고 계세요? 이건 바로 중국 최초이자 최후의 민주화 운동, 저항 운동이었던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날짜 (1989년 6월 4일)를 말하는 숫자입니다. 아래의 사진이 이 천안문 민주화 항쟁의 가장 대표적 사진입니다.
중국은 이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아주 철저하리 만큼 그들의 역사 속에서 지워왔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덕분에 지금 중국을 살고 있는 대부분의 30대 미만 중국인들은 이 사건을 기억은커녕, 있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어요.
지금 중국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과연 "천안문 민주화운동"을 알고나 있을지..ㅎㅎ
뭐 어쨌든, 이 사건의 발단은 1989년 4월 15일 당시 중국의 개혁과 개방. 그리고 특이하게도 공산당에서 민주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던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였던 "후야오방" 갑작스럽게 죽게 됩니다.
"후야오방"은 중국 근대화를 추진했던 "덩샤오핑"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더 넓은 분야에서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고 있던 인물이죠.
'후야오방(Hu Yaobang(胡耀邦)'은 1986년 학생들의 시위를 막지 못했다는 책임을 지고 사임을 했고, 그 뒤를 이어 8대 서기장이 된 "자오쯔양(趙紫陽)"의 경우도 대모 중이던 학생들에게 비교적 온건한 스타일로 대했고, 이것 때문에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후야오방과 같은 비판을 받으며 사임을 하게 됩니다.
당시 중국은 1978년 '덩사오핑(鄧小平)'이 중국이란 배의 키를 쥐게 되면서부터, 중국의 내부 개혁 및 대외 개방정책에 힘을 싣고 막 달리기를 하고 있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러시아와 비슷한 문제, 즉 사회주의 공산국가에서 자본주의 경제체계를 받아들임으로써 발생하기 시작한 사회적 부작용, 부적응등의 부정적 효과가 극심하게 잃어나고 있어 이 때문에 중국공산당이 골머리를 썩이던 시절입니다.
하급 공무원들의 만연한 부정부패, 극심한 인플레이션등이 일어나고 있어서 민심이 상당히 안 좋은 시절이었고, 여기에 민주화를 맛본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경제뿐만이 아니라 정치 부분에 있어서도 좀 더 민주화해 달라는 요구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어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민주벽 운동 사건 (1978.11 ~ 1979.12 민주벽 운동 / 수천 명의 사람들이 베이징 시청구의 긴 벽돌 벽에다 지금의 대자보 같은 형식으로 중국의 정치와 사회 문제에 대해 항의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건 중국공산당에겐 절대로 받아들일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안에서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민주화를 외치는 세력을 강하게 진압해야 한다는 "강경파"의 불만과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점에서 중국의 개혁, 개방의 상징이었던 "후야오방" 서기관이 갑자기 서거하게 됩니다.
그리곤 바로 "후야오방"의 서거를 추모하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天安門)"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후야오방이 추구하던 이상과, 그 사상에 동조하던 학생들, 시민들이 점점 모이기 시작했고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다 결국 중국 최초의 시민들에 자발적 행동에 의한 "민주화 시위"로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시위 규모가 점점 커지고 격렬해지는 것에다 더해서 '북경(北京)'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각 지방자치 단체 쪽으로도 이 시위가 번져가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 내부에선 천안문 앞에 모여있는 수많은 학생, 시민들을 강경하게 무력으로 진압해야 한다는 쪽과, 설득하고 달래서 와해시키는 쪽으로 갈려 치열한 논쟁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기록에도 남아있습니다.
(2001년 1월 Foreign Affairs / 논문 : "The Tiananmen Papers" ~ 콜롬비아 대학 Andrew J.Nathan 교수 저~)
이런 와중에 4월 중순, 후야오방의 장례가 끝나가면서 시위는 좀 늘어지는 분위기로 사그라들기 시작했는데, 이때, 만약 중국 공산당이 그냥 내버려 뒀더라면, 아마도 시위는 자진 해산했거나 쭈그려 들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되지만요, 역사는 그렇게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만 굴러가진 않는 건가 봅니다.
이때쯤 해서 중국공산당의 주둥이 역할을 하던 "인민일보"가 4월 26일 사설 하나가 실리게 되는데, 제대로 한방을 날립니다. 내용인 즉, "천안문에 모여있는 시위대는 반공산당이고 반 사회주의를 목적으로 하는 체제 붕괴를 노리는 집단의 계획적이고 사전에 모의된 음모다.(마치 요즘 계엄령을 선포해 놓곤 자긴 아무 잘못도 없다고 하는 누군가와 비슷합니다.)"라고 말이죠, 이것 때문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시위를 하고 있던 학생들과 시민을 자극하게 됐고, 느슨해지고 있던 민주화 시위가 갑자기 다시 극렬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13일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큰 변곡점이 생기게 됩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면서 천안문에 모여있던 학생들이 단식투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근데 이 시점이 참 천안문 앞에서 단식투쟁을 시작한 학생들의 판단이 절묘했다고 해야 할지, 시기를 제대로 잘못 판단했다고 해야 할지..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던 "미하일 고르바쵸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1931년 3월 2일~2022년 8월 30일)가 중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중국과 소련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서로 필요에 의해 친한 척을 할 뿐, 실제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아요. 세계 어떤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 쳐놓고 사이좋은 나라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대부분은 극단적 대립상태이거나 어느 정도라도 투닥거리는 게 있기 마련입니다.
근데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 중국을 방문한다고 하니, 당시 중국공산당 입장에선 이건 굉장히 큰 외교적 성과라고 볼 수 있는 큰 이벤트였었어요, 그래서 천안문에서 투쟁 중이던 학생들도, 고르바쵸프의 방문에 힘입어 고르바쵸프가 "소련"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트스)을 따라 중국도 이걸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고르바쵸프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외신들 앞에서 강하게 주장하려 했었습니다. 고르바쵸프가 중국에 온다고 하니 전 세계의 언론사가 중국에 오게 되었거든요, 당시 천안문 운동을 주동하던 사람들은 이 언론의 힘을 이용하려 했던 거 같아요.
중국 공산당이 그렇게 감추고 싶어 하는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사진과 관련자료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이유는 당시 고르바쵸프의 중국방문에 맞춰서 외신기자들이 중국 베이징에 엄청나게 들어와 있었었거든요.
덕분에 중국공산당이 그렇게 없애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도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사실적 증거 자료와 사진이 차고 넘치는 이유기도 해요.
뭐, 이런 이유로,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강경진압을 주장하는 "강경파(국무원 총리 '리펑'이 수장)"와 설득해서 해산시키려는 "온건파(당시 공산당 총 서기였던 '자오쯔양'이 수장)"가 부딪히게 되는데 이때, 결국 당시 공산당의 최고 권력자이자 서기관이던 "덩샤오핑"이 "강경파"에 손을 들고 힘을 실어주게 됩니다.
해산을 하라고 온건파의 "자오쯔양"이 여러 번 충고와 권고를 했음에도 당시 수많은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집결해 있었는데, 1989년 6월 4일 새벽 4시 갑자기 천안문을 둘러쌓고 있던 수많던 불빚이 한 번에 꺼지고, 그리고 30분 뒤 다시 거리를 비추던 등이 다시 밝혀지게 되는데, 이때 천안문에 남아있던 학생들에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자신들을 둘러쌓고 있는 수만은 탱크와 장갑차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탱크부대는 민주화 운동을 하기 위해 모여있는 학생, 시민들을 향해서 당장 해산하라고 최후통첩을 합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바로 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 특유의 정보 덮기로 인해서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때 희생되었는지 이당시 희생자와 관련된 정확한 자료나 데이터가 없습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의 숫자는 둘째 처 놓고 지금 중국에 있는 대부분의 젊은이들, 학생들은 중국에서 이런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는 게 당연할 정도로 "천안문 민주화 운동"은 중국의 근대 역사에서 깡그리 지워져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중국공산당의 역사 지우기가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겠죠.
당시 희생자를 추정한 자료들을 보면, 소련은 대략 300~1,000명 정도의 희생자가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나토는 약 7,000명, 뉴욕타임스는 400~800명, 중국정부의 그나마 남아있는 자료에는 진압을 나갔던 군인 포함해서 241명이 죽고, 7,000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 줄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 사건 이후, 학생들을 끝까지 설득해서 해산시켜 보려 했던 온건파 "자오쯔양"은 실각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공산당 총서기에 등극한 사람은 바로 강경진압을 주장했던 "장쩌민"이 등극하면서 이후 "덩샤오핑"이 죽고 나서 중국 최고의 지도자에 오르게 되죠.
이 사건으로 세계는 중국에 대해 큰 충격을 받고 일정 기간 동안 경제제도 단행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중국시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미국의 "빌 크린턴(Bill Clinton)"이 중국과 화해정책을 펴기 시작하더니 결국 2001년 미국 조지 부쉬(George W. Bush) 대통령의 묵인아래 중국이 WTO에 가입하게 되고 한 달 뒤에 143번째 정식회원국이 되게 됩니다.
중국은 이때부터 급진적인 경제 발전을 하게 돼요. 그리고 중국인들도 자신들의 민주화 항쟁을 잊기 시작합니다.
배고픈 인간을 포기하고, 배부른 개, 돼지가 되는 것을 선택한 결과죠.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이걸 이용해서 철저하리 만큼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모든 발자취와 흔적을 그들의 근대사에서 아주 깨끗하게 지워 버리고 맙니다.
중국이 절대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됩니다.
다음 글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세계 모든 국가 중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자신들의 손으로 지워버린 나라는 지구란 별 위에 중국이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무려 3번이나 했죠
만약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 성공했고, 그 당시 학생들이 정권을 쥐고, 중국의 핵심 정치세력이 되었다면, 지금 중국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부와 권력을 갖고 있는 그런 나라가 됐을 겁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전 시진핑 총서기가 계속 중국공산당의 핵심으로 남아 5 연임, 7 연임 계속하길 천지신명에 빌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중국이 20개 30개 국가로 분열할 수 있을 테니까요..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 실패한 것이 정말 그나마 하늘이 도운 일이라 전 생각합니다. 덕분에 중국은 온전히 전 세계에서 떨어진 떨거지 나라 확정됐으니깐요.
오늘 이야기는 재미있으셨는지요? ㅎㅎ
모두의 성공 투자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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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는 차트만을 보고 투자 판단을 하는 기술적 투자에 대해서는 가능한 언급하지 않습니다. 방법도 잘 모르지만, 그전에 직장을 다니면서 근무시간 중에 주식차트를 볼 수 없는 일반 근로자이자 소액 투자자들에게 있어, 차트를 보며 실시간으로 거래를 해야 하는 기술적 투자는 맞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을 다니고 일에 지장을 받지 않으면서도 꾸준한 투자로 얼마든지 수백 프로 이상의 수익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가치 투자의 본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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